우리의 거리 7
영화 [무뢰한]
바람이 세게 불자 지원은 높은 곳을 무서워한다며, 비상문을 황급히 열고 들어갔다. 현수는 커다란 맥주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조심스레 한 모금을 마셨다.
“푸흡-!”
역시 술은 현수한테 맞지 않았다. 지원의 성의에 대한 노력은 이 정도라고 생각한 그는 계단에 맥주를 뿌렸다.
다음날 성현은 현수 앞에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시선을 피하며 밥상 앞에 앉았다.
‘딱!’
현수는 덤덤한 표정으로 성현의 머리를 숟가락으로 한 대 내려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밥을 먹었다. 현수에게는 전날 성현의 부재가 딱 그 정도의 일이었다.
오전부터 있는 수업이 끝나고 성현은 다혜의 손을 잡고 떨어지는 꽃잎 사이를 걸었다. 성현은 손을 더 꽉 잡고 다혜를 보며 웃었다. 그들은 어쩔 줄 몰랐다.
그들은 대학가를 거닐며 여느 연인처럼 데이트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사랑이 가득한 시간이었다. 이 시간이 영원할 것만 같았다. 다혜는 행복한 이 시간을 붙잡고만 싶었다. 아마 붙잡을 수 있다면 붙잡았을 것이다.
“갈까?”
그는 조금 부자연스럽고 음흉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마도 그의 사랑은 조금 다른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혜는 조금 실망한 기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가 실망한 것보다 성현이 좋아할 모습이 더 중요했다.
둘은 모텔에 들어섰다. 그는 급하게 옷을 벗고 피임기구도 착용하지 않은 채 다혜에게 달려들었다.
불필요할 만큼 푹신한 침대가 왠지 모를 두려움이 들었다. 자신을 몸을 구석구석 애무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런 게 습관처럼 계속될까 하는 걱정이 집중을 흩트렸다. 성현에게 처음 관계를 허락했던 때 느꼈던 걱정과 다른 걱정이었다.
그런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다. 그를 향한 섭섭함과 서운함 그리고 실망이었다. 자신을 꽃처럼 바라봐 주는 그에게 고마웠지만 지금은 꺾인 꽃 같았다.
그런 걱정 이런 걱정들로 집중하지 못해서 내내 아프기만 한 섹스 후에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 밖의 봄 햇살이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를 따스하게 안아주는 그의 팔이 낯설게 느껴졌다.
“왜 그래?”
성현도 이상한 눈치를 채고 물었다.
“아니야.”
다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이불을 강하게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 시간 현수는 바닥에 땀이 뚝뚝 떨어질 정도로 녹음실에서 랩핑을 하고 있었다. 부족한 실력이지만 빠르고 빠르게 자신이 쓴 것을 비트에 맞춰 소리를 내뱉는 쾌감이 계속해서 솟구치는 느낌이 좋았다.
땀을 흘리고 나니 머리가 맑아졌다. 그는 녹음실에서 나와 복도 끝에 정수기에서 물을 마셨다. 인기척이 느껴져 옆을 보니 일전의 여학생이 현수를 보고 그냥 지나쳤다. 자존심 때문일까? 그녀는 현수를 애써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다시 연습하다가 해가 지기 전 학원을 나왔다. 노을이 핑크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같이 나온 여학생은 현수를 힐끔 보고는 반대 방향으로 몸을 휙 돌려서 갔다.
현수는 허한 기분이 들었다. 마음속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조각이 빠져나가자 커다란 빈자리를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나한테 이제 마음이 없구나.......’
자신이 망쳐버린 사이였지만 되돌리고 싶었다.
‘조금도 더럽혀지고 싶지 않은 넌 또 네 의지나 열정을 무시하고 자신을 속이겠지.’
순간, 현수는 우진이 말한 것을 떠올랐다.
현수는 점점 멀어지는 여학생의 등을 보고 주먹을 쥐었다.
“밥은 먹었어요?”
현수는 뱀이 기어가는 소리보다 작게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저요?”
여학생은 의아해하여 대답했다.
“네. 흐.......”
현수는 쑥스러움에 고개를 푹 숙이고 그녀에게 다가가 대답했다.
“그걸 왜 물어요?”
떨리는 목소리와 다르게 도도한 표정으로 그녀는 반문했다.
“아니, 밥같이 먹을까 하고......”
“진짜요?”
“네.”
“좋아요. 좋아요!”
그녀는 결국 감정을 참지 못하고 눈을 반짝이며 그의 소매를 잡았다.
새벽. 우진의 사무실 앞에서 상현과 현수가 만났다.
“기분 좋아 보인다?”
현수는 성현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너도 뭔가 오늘 다른데. 좋은 일 있어?”
“그냥.”
“오- 뭔가 있는데-.”
“됐어 들어가.”
둘은 시시덕거리며 이제는 조금 친숙한 계단을 내려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성현을 노려보는 우진이 보였다. 둘은 우진의 양옆 낡은 갈색 의자에 앉아 그의 입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딱!’
그리고 우진은 직원들이 쓰고 남은 숟가락으로 성현의 머리를 때렸다.
“와, 둘이 짰어?”
성현은 맞은 머리를 손으로 비비며 말했다.
일이 모두 끝나고 열세 명의 남자와 성현 현수 우진은 2층으로 올라가 바에 자리를 잡고 술을 마셨다. 독한 술을 병째 들고 남자들과 어울리는 성현과 다르게 현수는 커튼을 칠 수 있는 구석 자리에서 혼자 기본 안주인 과자를 야금야금 먹었다.
얇은 천과 같은 보라색 커튼 사이로, 지원의 모습이 보였다. 밝은 촛불에 비치는 그녀의 얼굴은 미소를 머금고 남자 둘에게 칵테일을 내밀고 있었다.
현수는 습관처럼 한숨을 쉬고 입안에 과자를 던지듯 넣으며 발을 뻗고 누웠다.
“왜 안 마셔 알코올 쓰레기!”
딱 봐도 술이 얼큰하게 취한 성현이 병에 든 술을 조금 흘리며 현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알코올 쓰레기라니!”
현수는 성현의 인중에 과자를 던지며 말했다.
어린 남자 두 명의 장난스러운 다툼에 남자들은 “와하하!” 소리를 내며 웃었다. 지원 옆에 앉은 우진도 보던 핸드폰을 내리고 미소를 지었다.
성현은 현수 옆에 털썩 누워 술 냄새를 폴폴
“바텐더 보고 있었어?”
“아니야 그런 거.”
“그럼 뭐 해? 술도 안 먹고.”
“그냥. 보기만 해도 취하는 것 같아.”
“.......바텐더랑 엮어줄까?”
“아니라니까 그런 거. 그리고 레즈비언이래.”
“레즈비언? 바텐더가?”
“응. 이름은 전지원이고, 그리고......”
“그리고?”
“아니야.......”
현수는 멀리서 카디건으로 가려진 지원의 팔을 보며 말을 아꼈다.
“나 먼저 간다.”
현수는 비상계단으로 담배를 피러 갔다.
“왜 더 안 있고?”
차분한 목소리를 지닌 지원은 사라지고 취해서 갈라진 목소리만 남아있다.
“술도 못 먹는데 뭐하러, 재미없어.”
현수는 편하게 대답하고 건물을 벗어났다.
아침에 해가 뜨고 나서 술자리는 마무리가 되었다. 잠이든 남자들을 그대로 소파에 두고 사무실에 들렀다 다시 돌아온 우진과, 잔뜩 취한 성현과 지원만 건물에서 나왔다.
“차로 데려다줄까?”
우진이 비틀거리는 지원한테 물었다.
“됐거든.”
지원은 우진의 가슴을 툭툭 치고 홀로 작은 가방을 들고 멀어졌다.
“아, 성현아. 너 2동 산다고 했지.”
“응. 삼촌.”
“그 근처니까. 지원이 좀 바래다줘라.”
“옛썰.”
성현은 껄렁거리며 서투른 경례를 하고서 지원의 뒤를 쫓았다.
안개로 자욱한 날씨에, 성현은 비틀거리는 지원을 부축해 그녀의 집에 올라갔다. 성현은 그녀의 작은 가방에서 전자 열쇠를 들어 문을 열고 그녀의 침실에 인사불성인 그녀를 던져 놓듯 내려놓았다.
“어휴, 뒤지겠네.......”
성현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지원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야무지고 자기관리를 잘하는 그녀가 인사불성이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
성현은 아랫입술을 깨물며 그녀가 누운 침실을 나갔다 들어오길 반복했다.
무방비 상태로 옷도 풀어헤쳐 진 그녀의 모습에 성현은 위험한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레즈비언이라는 사실 또한 지금의 성현에게는 오히려 자극의 반작용 같았다. 성현은 겉옷을 벗고 침실의 문을 천천히 닫았다.